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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

제목 상실과 애도, 그리움, 엄마라는 불가사의한 존재, 《H마트에서 울다》 by 미셸 자우너
작성자 최현영 작성일 2022-03-29
작성일 2022-03-29


평단의 평가가 좋은 것은 물론, 영미권 서평 사이트 goodreads와 각종 독서클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20대 한국계 혼혈 여성의 회고록(memoir)라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내 개인적인 선호와 상관없이, 글을 쓰고 편집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나오는 모든 책의 저자/편집자 등 모든 관계자에게 경의를 품으며 책을 대하는 편이지만, 이 책의 경우 제목과 표지 디자인, 그리고 인종 다양성의 수혜가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견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 읽고난 후의 독후감은 책을 읽기 전의 그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 만하다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필연의 이별, 그 이별이 예측할 수 없었던 때에 다가왔기에 황망함과 당황스러웠고 고인에 대한 애도, 가족의 의미와 자신의 인생. 그 모든 것이 신선하고 세밀한 디테일 속에 잘 녹아있었다. 예스24 저널의 저자 인터뷰에서 글쓰기를 통해 치유를 많이 경험했다고 밝혔는데, 평소에 글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 정밀한 에피소드들은 나오기 힘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자 한번 써볼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니라 평소에 끄적여왔던 글들을 다듬고 정돈하여야 이렇게 풍부한 글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라는 인디 팝 밴드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미셸 자우너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1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랐다. K-잔소리와 통제본능으로 장착한 어머니, 10대 때 약물중독에 빠졌었고, 결혼생활 중에도 성매매를 일삼았던 아버지 슬하에서 외동딸로 자라며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그녀는 재미교포들이 대부분 겪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학창시절을 보냈던 서부 오리건 주 유진이라는 소도시에서 동부로 대학을 가고, 동경해 왔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너무나 갑자기 어머니의 암 발병 소식을 전해듣는다. 저자에게 친구 같았던 막내이모인 은미 이모를 같은 암으로 떠나보내고 몇 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냥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어머니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그야말로 애증의 존재였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회상하며 이제는 어머니의 보호자로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그토록 떠났던 유진으로 돌아온다.

제목에도 나와있는 H마트는 이마트 저리가라 할 만큼 거대한 한인 마트이다. 아니 국토가 협소한 우리나라의 이마트에 비할 바가 아니라, 월마트보다 조금 작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한아름마트라고 했다가 H마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고 알고 있다. 10여 년 전, 미국에 잠시 체류했을 때 한두 번 가 봤다. 교외의 넓디넓은 단층건물로 짓는 미국의 마트들은 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잠깐, 남편과 둘이서 회사 내팽개치고 잠깐 살았던 내게도 늘 보물창고처럼 즐거운 곳이었다. 교환학생 갔을 때는 당연히 이런 대형 한인 마트는 없었다. 구멍가게 같은 일본인 슈퍼에서 고향만두랑 다 잘라놓은 김치를 사다가 먹었던 기억이 난다. 비단 식재료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유명한 프랜차이즈들(파리바게뜨, BBQ, 풍년떡집...)이 들어와있어서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누가 나처럼 죽을 때까지 영영 못 볼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19쪽

H마트에서 장을 보며 내 엄마가 죽어도 똑같이 돌아가는 세상을 생경하게 느끼며 저자는 다른 사람들도 영영 못 볼 사람을 그리워할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고향이 아닌 땅에서 뿌리 내리며 강하게 살아온 여성이다. 저자가 어릴 때 울면 "울긴 왜 울어, 부모 죽었을 때나 우는 거야."라고 매정하게 들리는 말을 하지만, 어쩌면 고향을 떠나 약해지려는 마음을 차단하며 어머니 자신에게 타이르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 중에서 나의 감정선을 건드렸던 것은 저자가 발이 까지지 않고 신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는' 부분이었다.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149쪽

우리 엄마도 그랬다. 그 감각이 어리고 젊었을 때의 내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곽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날렵한 선을 좋아하는 나는 왜 헌 신발을 만들어 주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엄마의 그런 살뜰함이 내겐 숨막힘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공감력이 낮지 않은 나는 그것이 신발을 길들여 내 발이 까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역할 바꾸기를 완벽하게 해내려면 엄마가 드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나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싶다고. 음식은 우리끼리 나누는 무언의 언어이며, 우리가 서로에게 돌아오는 일, 우리의 유대, 우리의 공통 기반을 상징하게 됐다고. 170쪽

역할이 바뀔 때가 반드시 온다. 보호자였던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때가. 저자는 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엄마의 역할을 자신이 맡으려고 마음 먹었다. 음식이란 서투른 말보다 훨씬 더 강한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나도 추석 때 빠지지 않는 엄마의 토란탕과 잡채를 그리워하니까. 밀키트를 애용하는 나라는 엄마의 음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될까? 지금도 애들이 가끔 농담으로 '엄마의 손맛'이라는 말을 하는데 자꾸 뒤가 켕긴다. '손맛'이라는 말 들을 음식을 해주지는 않는 것 같아서이다.

엄마는 이제 슬금슬금 모국어로 말을 해서 특히 아빠를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능숙한 영어로 말해온 엄마이기에 엄마가 영어로 바꿔 말하는 걸 까먹기 시작해 우리가 소외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182쪽

저자와 저자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투병 과정 속에서 겪었던 수많은 당황과 망연함이 글 속에서 전해졌다. 그리고 20대인 저자가 40대 중반인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정신 연령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가 부모님이 이곳저곳 편찮으시긴 하지만, 그래도 건재하시다는 것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또 엄마로서 12년을 살아오며, 우리 엄마는 아주 좋은 엄마였고 훌륭한 엄마라는 중대한 재발견을 한다. 내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는 말인 "빨리 해라, 공부해라"라는 말을 내 엄마는 한 번도 내게 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성격이 다소 상극이어서 엄마를 너무 부정적으로 평가했었던 것 같다. 평범한 한국 여성이었으며 아니 평균보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한다.

내게 엄마는 "뜨거운 아이스커피"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엄마에게도 나는 쉬운 딸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 미셸 자우너의 모습을 보며 나도 부모님의 보호자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속에 나오는 수많은 음식 중에서 '잣죽'이 마음에 꽂혔다. 잣은 정말 비싼 식재료다. 그래도 예전에 아이들이나 남편이 속이 아플 때 몇 번 만들어봤다. 죽은 진짜 세상 쉬운 음식이지만, 또 은근히 귀찮고 신경 쓰이는 음식이기도 하다. 잣과 불린 쌀을 믹서에 갈아 은근한 불에 끓이며 잘 저어주고 간도 한국인답게 애매한 표현으로 "간질간질하게" 해서 한 상 내어봐야겠다. 잘 익은 알타리 무랑 먹으면 정말 일품이다.

그리고 저자는 포기하려던 밴드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멋지게 이어가고 있다. 또 언젠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환해야 할 시기가 온다고 해도 그때도 멋지게 살아갈 것 같다.

유튜브에서 검색하여 저자가 도토리묵 만드는 영상을 보았다. 주부 경력 16년차인 나도 엄두도 못 내는데 대단했다.

그리고 저자가 책 속에서 여러 번 인용한 망치여사도 찾아봤다.

한국에 백종원이 있다면 미국에 있다는 '망치여사'이다.


오늘부터 loving한 우리 엄마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lovely한 우리 엄마의 모습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야겠다.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기에...

※ (사)한국독서문화재단의 독서문화사업으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