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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사 독서치료

제목 (3) 문학적 경험에 관한 이론적 토대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의 심리를 전체적이고 유기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능이 호메오스타시스 Homöostasis (동적 평형상태) 기능이다. 문학이론에서 다루는 화해의 이론이나 보상의 이론이 바로 이 유기체적 기능과 결부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호메오스타시스란 모든 생리적/심리적 행위가 유기체로서 항상 평형을 유지하여 환경이 바뀌어도 건강을 유지하는 과정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과정을 유기체가 일종의 욕구충족을 해 나가는 과정이다. 만약 인체에서 혈당량이 일정한 한도 이하로 떨어졌을 때는 부신선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간장에 축적되어진 중성지방인 글리코겐을 당질로 바꾸는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 당질이 혈액 중에 보내어져서 한도 이하로 떨어진 혈당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거꾸로 혈액 속의 혈당이 과잉되었을 때에는 췌장(이자)이 인슐린을 분비하여 혈액중의 당분을 제거한다. 이런 호메오스타시스가 무너지면 그것이 당뇨병이 되고 치료를 위해 인위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이다. 이렇게 생리적인 평형이 무너졌을 때 느끼는 생리적 욕구와 같이 심리 또한 그 평형이 무너졌을 때 접촉 욕구를 지닌다. 문학사를 살펴보아도 계몽주의 이후에 낭만주의, 인상주의 이후에 표현주의와 같이 평형을 이루려는 부산한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세헤라자드가 술탄 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천일야화를 왕에게 들려주는 것은 단순한 이야기 본능이 아니라 심리적 평형유지의 욕구이다.

문학이 단순히 리비도적 충동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본능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혼동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스스로도 후기에는 리비도적 충동이 성적 충동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했듯이, 리비도 충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충동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맺으면서 심리적 인력에 따라 전면에 부상했다가 다시 배면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일차적 경험의 수단을 단순히 욕구충족으로 보기보다는 호메오스타시스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학치료는 이미 걸린 당뇨병을 치료해서 자율적으로 평형상태를 유지하도록, 즉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 전체가 호메오스타시스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 수단은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영탄, 기쁨(웃음), 슬픔(울음), 우정, 사랑, 희망, 실망, 비꼼, 야유, 반어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조건에 대한 호메오스타시스의 과정은 실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일차적 기능은 우선 보상의 메카니즘이다. 그 다양한 보상의 메커니즘의 양상에 대해서는 이미 노르드롭 프라이의 원형비판을 토대로 야우스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야우스는 그런 일차적 경험의 구조를 그의 『심미적 경험과 문학해석학』에서 ‘주인공과의 동일시’로 유형화하면서 그 세목을 다음 5가지 유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a) 친화적 assoziativ b) 찬양적 admirativ c) 동정적 sympathetisch d) 승화적 kathartisch e)반어적 ironisch 동일시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준거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띤다기보다는 그때 그때마다의 구체적 사회적/역사적/문화적 상황 변화에 따른 상수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는 “진정한 비극은 기독교 문화의 바탕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는데 비극이 어느 정도는 시대와 연계해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근대 이후에 서구문화가 유입된 이후에서야 비극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거나,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서 더욱 완전하게 이해 가능하게 된다. 카타르시스적 동일시를 비극적 카타르시스와 희극적 카타르시스로 나눈다면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한국 문화는 희극적 카타르시스 수용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독일문학 수업에서 얻은 체험이지만 한국의 동시대 학생들에게 레싱의 『민나 폰 바른헬름』에 나오는 텔하임 Tellheim은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인간의 표상으로 비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텍스트를 문학 수업에 임하는 교수나, 치료할 때의 상담자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어야 하지만, 어떤 텍스트를 특정한 이론에 따라 당해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 밖에 낼 수 없다. 이 말은 문학은 그저 형식일 뿐 그 진리내용조차도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심급이 될 뿐이다. 문학은 독자에게 타자로서 기능한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독서 행위가 미정성과 부정성으로 가득 찬 문학을 독자가 항상 표상과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현재화함으로써 완성된다는 뜻이다.

독서치료의 관점에서 일례로 d)의 카타르시스적 동일시를 응용해 보자. 독자/관객은 비극적/희극적 주인공과 감정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억압된 욕구를 끄집어내고 동시에 관객/독자로서의 내담자는 정열로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낯선 역할을 하는 것이 치료의 과정이 될 것이다.

일등육을 남긴 소를
나는 안다
그는 틀림없이
1등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1등 목장에서
1등 축우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1등 사료를 먹고
빈둥거리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남들보다 빨리
120킬로가 되자
재깍
도축장에 끌려와
살이 찢기고 뼈가 쪼개졌다
그때
1등소는 이런 소리를 들으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1등육이다!


-박의상 ⌈일등육⌋ 전문

형식적으로 1등 또는 일등이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됨으로써 이미 화자가 편집증을 겨냥하고 있다/편집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현금/작금의 한국 사회가 1등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 또한 가시적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 기의가 전혀 다른 1등육과 일등육 간의 차이를 시인은 간과하지 않는다. 1등이 목표하는 바가 일등 밖에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패러디를 읽고 적어도 심리적으로 1등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학생이나, 또 1등에 고착되어 있는 사회/개인은 이 시에서 다른 인식을 얻을 것이다. 이런 재인식을 통해서 의식과 (1등을 하고 싶다는/해야한다는) 무의식과의 불균형이 해소된다. 그러나 만약 아도르노의 이론대로 (또는 위에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동정과 연민’에서의 c)의 번역대로) 한다면 사회적 부정, 지배체제의 부정과 같은 인식을 얻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일차적 (20세기말의 특정한 사회적)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작가가 가장 의식적일 때도 무의식적이고, 비평가/학자는 가장 무의식적일 때도 의식적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학 치료에서든, 즐거운 독서행위에서든, 문학적 인식은 심리적 해방, 유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이 점은 문학이라는 수단이 종교로서의 역할, 치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 Adler는 이미 오래 전에 문학치료/독서치료를 그의 심리치료 요법으로 도입하였는데, 그는 내담자/환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가능하면 기승전결로), 그 내담자의 글에서 심리상태, 즉 내담자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내담자의 사회적 상황은 어떤지 등을 판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난 뒤, 이 내용을 거의 비슷한 상황으로 바꾸어가며 내담자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내적인 병인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이 시에서 보는 웃음은 관객/독자/내담자/환자로 하여금 우월한 허위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을 파괴하면서 느낀 자기만족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친화적 assoziativ이라 말할 수 있다. 허두에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a)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야우스의 분류로는 a)와 d)에 해당된다.

그러면 e)의 반어적 동일시를 예로 들어보자. 이 과정에는 허구의 전제조건을 의식시키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 즉 내담자에게 놀이규칙을 알려주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 단계는 이미 이차적 경험에 속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반어를 통하여 독자/내담자의 심미적 자세를 부정적으로 또는 도덕적 유발을 통해 의문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상담자는 환자의 상태를 적확하게 판단한 후에 그를 치료목표로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laß das
komm sofort her
brung das hin
kannst du nicht hören
hol das sofort her
kannst du nicht verstehen
sei ruhig
faß das nicht an
sitz ruhig
nimm das nicht in den Mund
schrei nicht
stell das sofort wieder weg
[...]

wer nicht hören will
muß fühlen Erziehung von Uwe Timm

일상의 언어에서 수집된 언어의 배열을 통해 단순한 듯 하면서도 아주 좋은 시가 되었다. kannst du... 로 시작하는 의문문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지시와 억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은 그저 복종만 해야 할 뿐이다. 동물을 조련하는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텍스트를 억압으로 고립된 환자나 강박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할 때는 전제조건을 미리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시가 야우스의 분류대로 하면 c)와 e)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환자/내담자에게 변형시키면서 치료할 수도 있다. 환자/내담자의 경험 영역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글을 만들게 하되 차츰 차츰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적응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아리스트텔레스 해석의 b), 즉 조정이론과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a), b), c), d) 의 1차적 경험들은 비교적 선험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세계문학, 시대적으로 소격한 독자와 문학 어디에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일차적 경험을 중심으로 문학을 살펴보면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심미적 경험이 단순히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 Verstehen der Intention des Werkes’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석학적으로 볼 때 문학적 경험은 두 가지 층으로 구별되는데, 그것은 곧 일차적 경험과 이차적 경험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성찰 영역, 곧 이차적 경험을 말한다. 이차적 경험을 할 때 독자는 성찰을 통해 판단하면서 일차적 경험, 즉 원초적 감성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일차적인, 성찰 이전의 문학적 경험은 상상하는 의식에 대해 의사소통적 실행 틀을 형성해 준다. 이유는 문학에 묘사된 사건이나 상황 속의 인물과 감정적인 동일시(무의식)가 먼저 오고, 그에 대한 인지적 구조(의식)가 오기 때문이다. 일차적 경험 또한 상대적이다. 다시 말해 시대적 억압, 모순에 대해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준거가 될 뿐이다. 우리는 그 평형을 유지하는 방법이 또한 다양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서 살펴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비판하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카타르시스 내지는 “승화의 이상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자] 염두에 두고 있는 관객의 본능과 욕구의 육체적인 충족대신 대리 만족으로서의 미적 가상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과제를 예술에 부여하며, 이러한 점에서 지배자적 관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즉 카타르시스는 억압과의 공모 하에 감정에 반대하는 일종의 순화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예술 신화의 일부로서 낡은 것이며 또한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진술은 비극의 효과가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현대 예술에 와서야 심미적 경험의 특수한 기능이 실현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지나치게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패러다임 속에서만 생각을 함으로써 의사 소통적 범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의사 소통적이라 함은 우리가 말하는 문학의 일차적 기능으로서의 동일시를 말한다. 즉, 화자나 주인공과 동일시함으로써 정서적 해방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 속에는 독일의 독자가 처한 독일 사회의 합리적 측면이 농후하게 배어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심리적 측면도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런 문학이론이 부적절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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